
영화에는 큰 사건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미아케 쇼 감독의 '여행과 나날'은 조용히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아가는 여정을 담아냅니다. 슬럼프에 빠진 시나리오 작가가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난 여행에서 마주하는 것은 극적인 전환이 아니라, 천천히 움직이는 일상의 질감입니다. 이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문법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며, 움직임 그 자체에서 영화적 흥미를 이끌어내는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즈 야스지로 문법의 현대적 계승
'여행과 나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영화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언어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오즈 야스지로가 만들었던 '동경 이야기', '만춘', '안녕하세요' 같은 작품들은 1950년대에 제작되었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봐도 놀라운 세련미를 보여줍니다. 그 비밀은 바로 움직임을 포착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면 거의 모든 컷이 인물을 중앙에 배치하고 있으며, 카메라 높이는 인물의 눈높이보다 약간 아래에서 인물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구도는 인물의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을 담아내어,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카메라에 포착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부채질을 하는 모습, 집안을 오가며 손님을 맞이하는 동작, 노인이 바닷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움직임 같은 일상 속 사소한 동작들이 영화의 중심이 됩니다.
'여행과 나날'은 이러한 오즈 야스지로의 촬영 문법을 그대로 따릅니다. 1대 1.37의 화면 비율은 오즈가 활동했던 시절의 1대 1.33과 거의 흡사하며, 이는 요즘 영화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옛날 화면비를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카메라는 인물의 눈높이보다 살짝 아래에서 인물을 관찰하고, 인물들은 화면 중앙에 배치되어 정해진 동선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심은경 배우가 시나리오를 쓸 때 움직이는 손의 움직임, 여관 주인이 여관 일을 할 때의 신체 동작, 얼어붙은 강을 건널 때 보여지는 작은 움직임들에서 관객은 움직임의 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퍼펙트 데이즈를 만들었던 빔 벤더스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의 열렬한 팬이었고, 1980년대에 이미 오즈의 촬영지 성지순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외국인 감독이 만들었지만 토종 일본인의 감성이 강하게 담긴 퍼펙트 데이즈 역시 1대 1.33의 화면 비율을 채택하며, 화장실을 청소하는 주인공의 섬세한 움직임에 집중했습니다. '여행과 나날'을 재미있게 본 관객이라면 퍼펙트 데이즈 역시 비슷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움직임의 미학이 만들어내는 영화적 진실
일본 영화를 보다 보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별다른 사건이 없고 충격적인 대사도 없는데, 이상하게 계속 화면을 쳐다보게 되는 숨은 매력이 존재합니다. 리틀 포레스트, 카모메 식당, 남극의 셰프 같은 음식 영화들이 대표적입니다. 이런 영화들은 내용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만, 관객은 편안함을 느끼며 계속 보게 됩니다. 그 비밀은 움직임이 갖는 물질성, 즉 움직임의 질감에 있습니다.
음식 영화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단순히 식욕이 자극되는 것을 넘어, 음식을 만들어가는 인물의 움직임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화려한 동작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기본적인 동작인데도, 거기에서 무언가가 흥미롭게 움직인다는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일본 영화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흥미로움을 포착해내는 것에 굉장히 집중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여행과 나날'의 주인공은 심은경 배우가 연기하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그는 지금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어서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었고, 그 감각으로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의 일상까지 모두 언어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져서, 새로운 경험의 떨림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감각과 멀어졌습니다. 주인공은 이를 '언어에 갇힌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오래된 카메라를 들고 외딴 곳으로 떠난 주인공은, 손님이 하나도 없는 낡은 여관에서 여관 주인과 며칠을 보내며 소소한 해프닝을 겪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 초반에 주인공이 혼자 웃으며 상상했던 여행 시나리오의 코믹한 장면들을 실제로 겪는 것과 같습니다. 큰 사건은 없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습니다. 말보다 침묵이 많은 장면들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늘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숨 쉬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일상의 감각을 회복하는 영화적 대안
현재 한국 영화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많은 제작자들이 지루한 구간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빠져 있습니다. 그 결과 순간순간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얄팍한 눈속임 연출만 반복하게 됩니다. 최근 개봉한 일부 영화에서는 아파트 바깥에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 존재한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설정을 스스로 잊어버리고 주인공이 자유롭게 바깥을 돌아다니는 설정 오류가 발생합니다.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지루함을 없애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영화 전체의 통일성이 사라지는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관객의 수준이 너무 올라가서, 순간만 대충 때우는 눈속임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화면 안에 진짜를 담아내야 합니다. '여행과 나날'이 보여준 방식은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습니다. 움직임을 통해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이 방식은 화면 안에 들어가는 모든 요소를 정성스럽게 통제해야만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연출된 것이지만, 오히려 영화적으로는 훨씬 더 진짜에 가깝게 느껴지는 요소입니다.
저예산 환경이 주류가 될 미래의 한국 영화는, 역설적으로 일본 영화의 장점을 배워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카메유미가 등장했던 영화 속 영화 파트와 주인공이 직접 체험하는 여행의 해프닝이 서로를 반영하는 거울 구조도 흥미롭지만,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인물들의 움직임에 있습니다. 웨스 앤더슨처럼 픽스캠에 균형감 있는 미술 세트를 보여주고, 그 안정적인 구도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을 보며 관객은 편안함을 느낍니다. 정해진 위치와 동선 안에서 최대한 절제된 움직임만 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는, 현실적인 생활 연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형식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미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국보의 가부키처럼 특정 동작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인생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동작을 절제하더라도 그 형식미 안에서 오히려 인간적인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일본적 미약이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서 건강한 방향으로 발현된 이유이며, '여행과 나날'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행과 나날'은 큰 사건 없이 조용히 흘러가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더 쓸쓸합니다. 인물은 바쁘게 달려가지도, 극적으로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지나며 조금씩 스스로를 마주합니다.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우리의 나날을 돌아보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미아케 쇼 감독은 2023년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2024년 '새벽에 모든 것', 그리고 2025년 '여행과 나날'로 매년 명작을 내놓으며 작두 탄 퍼포먼스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그의 최근 전작들도 찾아볼 것을 추천합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일본 영화의 감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 '여행과 나날' 리뷰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hS2WSmKyIAg